지금은 섬유 산업이 발달하여 일상에서 무명을 사용하는 일이 드물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에도 서민들은 이불이나 천으로 무명을 많이 사용했다.
이야기는 무명에 그린 태극기에 대한 실향민의 사연이다.
아니, 이 땅의 아픈 역사 이야기다.
지도에서 보면 황해도 남단은 위도 38도선 아래에 우리나라에 위치하고 있다.
해방 직후 원치 않는 분단의 시작은 그곳에도 꼭 찾아왔다.
특히 배천면은 배천 조씨의 집성촌인데, 잘 알려진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배천 조씨이다.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평야 지대에 농산물이 풍부하여 사람들은 여유가 있고 기품을 갖춘 전형적인 선비들이다.
625전쟁은 모두에게 비극이지만 배천조씨 일가에게는 좀 더 각별하다.
625전쟁 이후 휴전선이 38선보다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고향 땅이 북한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도 국군으로 참전해 훈장을 받는 공을 세웠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우리 땅에 정착해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도 통일의 그날을 늘 기다렸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래 전에 눈을 감았다.
장례식에서 유품을 정리하고 노랗게 빛바랜 천을 관에 자주 넣었다.
오래되어 부러진 흔적이 낡고 잡스러웠지만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무명 태극기
당시 생존해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만류했으나
나와 형제는 같이 넣어주기로 했다.
어머니와 두 분이 함께 비명에 가신 상황에서 우리는 지옥을 겪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겪어야 했던 테러와 불의를 여기서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27년이 지난 지금도 친일파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다.
현실은 아직도 허리가 잘린 분단국가다.
어느덧 익숙해져 새로운 세대는 통일의 필요성까지 잊고 사는 듯하다.
직업상 강의를 많이 하는 나는 애국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광명태극기 이야기를 한다.
안중근 의사의 외갓집이기 때문이 아니라 조상들은 모두 마음속에 태극기 하나를 품고 살아왔다.
무명 태극기는 아버지 어머니, 우리 할머니가 직접 그린 것이다.
31운동에도, 해방된 날도 죽는 그날까지도 소중히 여겼다.
일본인이 가져온 안중근 의사의 유품은 특필 전시하면서도
진실은 숨겨야 했던 어떤 이들에게 평생 고통받으며 지켜왔다.
다시 31절이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간 애국선열들이 떠오르는 시기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뒤 20년 이상 지난 2016년 한국전 참전용사로 인정받았다.
아버지와 선대의 독립운동은 사료가 북한에 있어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부러진 흔적이 헤어진 무명 태극기처럼 잊혀지는 역사가 될 것이다.
보훈은 필요 없다.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고 인정받는 것이 진정한 보훈이다.